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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었지

대피소에서의 길고도 짧은 하룻밤(대청봉 정복기).....2

 

 

그 때

1997년 10월 13일은 설악산 단풍이 절정에 이를때였다.

등산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였고 관광객들도 넘칠 때.

 

중청 대피소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꽉 차 있어 방을 빌릴 수도 없고

입구 마루밖에 쉴만한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 마루도 문 바로 앞 사무실 문을 옆에 둔 그 좁은 공간에

우리팀이 자리잡고 있었고 우리의 잠자리도 바로 거기였다.

 

몸이 그러해선지 생리적인 생각도 멈추어 버리고

내 몸은 추위와 긴장속에서 점점 더 경직되어 갔다.

다리 한쪽을 옮길수도 없이 몸이 아파오지만 내색할 수도 없고

그저 여섯시간의 사투를 벌이고 일단 대피소에 온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밀려온 등산객들 때문에 대피소가 만원이라 입구 마루도 감지덕지....

편하게 자려면 소청대피소까지 가야 한다는데 더 이상 한 발자욱도 내딛을수 없는 처지.

그나마도 우리를 마지막으로 마루에도 인원이 차서 다음에 오는 사람들은

소청대피소까지 가야 했었다.

 

우리팀은 문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찰밥을 해서 도시락 두개로 만들고 각자 한가지씩 가져 온 반찬으로

만찬을 대신하고 다시 짐을 싸서 배낭으로 베개를 만들어 그 자리에 누웠다.

 

일행의 천덕구러기가 되어 민폐를 끼치는 내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는 일행들과 말도 하지 않고 피곤한 몸 한쪽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내 몸은 감각이 사라져 버렸는지 아프지도 않고 정신만 또렷해서

내일 다시 하산해야 하는 큰 고비를 걱정하며 쉽게 잠을 잘수도 없었고

밤새도록 그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통에

잠귀 밝은 나는 잔건지 깬건지 모르고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새벽

어수선한 가운데 일어나니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어젯밤 드러 누울때만 해도 못 일어 날 것 같은 몸이였는데

조금이라도 쉬고 나니 그냥 그냥 걸을만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침 세수는 물 한컵으로 해결해야 했다.

대피소에 저장해 놓은 물탱크의 양이 모자라서 절약해야 한다고 한다.

취사실이 아래층에 있다고 해서 내려 가 보았다.

세상에~~~~

 

이층으로 되어 있는 침대가 지하 1층 2층까지 즐비했는데

늦게 도착한 우리는 문입구 마루에서 자야 했던거다.

숙박 이용비가 오천원이였던가?

마루에서 잔 덕에 그 오천원 안 내고 공짜 잠을 자기는 했지만.

 

밖에 나와 보니 부슬비도 내리고 안개가 자욱했다.

 

저~~ 위 대청봉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우리 일행 모두 안개에 가려진 대청봉을 올려다 보며

아무도 사진 찍으러 가자는 사람이 없었다.

 

대청봉까지 올라가는 시간, 사진 찍는 시간, 내려 오는 시간 등을

따져 보니 하산할 길이 바쁜 것 같아서였다.

아쉽지만 그냥 내려 가자

나는 뭐 일찌감치 사진 찍는 걸 포기했으니까....

 

하산은 중청 대피소 바로 옆길에서 시작해서

희운각, 천불동 계곡, 양폭산장, 비선대, 신흥사 코스다.

병원 신세 안지려면 정신 차리고 내려 가야 한다.

 

대피소에서 어떤 아줌마는 계단에서 발을 잘못 디뎌 골절상을 입어

헬리콥터를 불러 병원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 헬리콥터 비용이 삼백만원이라고 한다.

 

나는 끝까지 잘 내려 가리라....

삼백만원이라는 거금도 없고

일행들 한테도 결코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잘~~~ 내려 가리라.....다짐하면서도

마음 한켠 걱정이 태산이였다.

 

평소에도 등산을 다닐 때면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 올때가 더 힘들었다.

결혼전에는 수락산 올랐다가 내려올때 미끄러져서 죽을뻔도 했으니까....

다행히 바위 끝에 걸친 나무에 다리가 걸려서 큰 부상은 없었지만

올라 갈때는 다람쥐같이 올라 갔다가 내려 올때면 늘 다리가 후들거린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누구 말에 의하면

두 눈의 시력 차이가 많이 나면 그럴수도 있다던가?

아무튼 나는 집에 무사히 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