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은 내게 너무나 우울한 해였다.
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남편의 성품도 하나님과 서서히 멀어지고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터라 내 몸에 이상이 생겼다.
갱년기 증상은 40대 초반부터 나타나서 그러려니 하며 살았지만
나 자신을 자꾸 안으로만 움추러 들게 하는 우울증의 증세는
매일 매일이 너무 힘겨운 날들이여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루 종일 껌을 씹어대는 거였다.
기도? 찬양? 말씀?
나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도 들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내 사랑은 우울증 앞에서 맥을 못추고 주저 앉게 만들었다.
눈 뜨면 껌 반쪽을 씹고 어느 정도 씹다가 다시 반쪽을 씹어 버리고
하루 종일 껌만 씹다가 밥맛도 잃어 버리고 갈수록 몸에 힘이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일년 뒤 내 치아는 위 아래가 삭아 버리고 말았다.)
중국에 갔던 둘째가 귀국하면서 조금씩 회복이 되고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생각해 낸 것이 뒷산 오르기였다.
집 바로 뒤에 조건 좋은 야산이 있어 바람 쐬고 운동하기에 적당해서
아침 먹으면 슬슬 걸어 올라갔다가 저녁에도 몸 상태가 좋으면 다시 한번 오르곤 했다.
등산이 아니라 산책 정도의 산행이라 산을 올랐다 내려와도 별로 땀도 안날 정도니
이런 수준으로는 북한산도 못 오를 체력으로 나는 큰 모험에 너무 쉽게 도전했다.
1997년 10월 13일
내가 그동안 어떤 환경이였는지 모르는 우리팀에서 설악산 산행을 계획하고
내게도 같이 가기를 청했을때 나는 겁도 없이 승낙해 버렸다.
뒷산도 꾸준히 올라 다녔으니 뭐~~ 천천히 올라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둘째가 있으니 남편의 식사 문제도 해결됐고 내 몸도 어느 정도 괜찮은 것 같아서
말로만 듣던 설악산 대청봉 산행에 도전한 것이였다.
10월 13일 오전 6시 30분
녹번역에서 일행을 만나
동서울 터미날에서 다른 팀들과 합류하여 8시 30분에 고속버스 출발.
구불구불 강원도 길을 따라 버스가 돌때마다 나는 연신 멀미에 시달렸다.
오후 1시경 오색약수에서 버스는 우리를 내려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좀 살 것 같았다.
버스 멀미중 고속 버스 멀미가 가장 심한데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식사도 제대로 못해서 멀미가 더 심했을것이다.
오색약수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기운은 좀 나는것 같아도
배고픈 속에 밥이 들어가 한 숨 잤으면 딱 좋을 그런 몸 상태에서
오후 2시 오색약수를 출발하여 대청봉을 향해 올라 갔다.
식당 아저씨 말에 의하면 오색약수에서 대청봉까지 서너시간이면 오른다나?
그때는 그 말이 왜 그리 잘 믿어지는지.....
산을 오르기 시작해서 삼십분도 안되는 시점에서부터
내 다리가 힘들다고 자꾸만 쉬라고 사인을 보내었다.
산의 경사는 45도 아니 내가 보기에는 60도처럼 보였다.
얼마 가지 못해서 나는 부러진 나뭇가지에 의지하며 올라가다
종내는 두 손으로 두 발로 산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을 써도 발이 안 올려지는 걸 어쩌란 말이냐?
건강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눈에서 멀어진지 오래고
날 염려한 최집사가 나랑 보조를 맞춰 내 벗이 되어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걱정해 주었고
우리는 먼저 간 일행을 보면 걱정말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폭포를 지났는지, 계곡을 지났는지, 주위를 둘러 볼 시간도 여유도 없이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최집사와 나는 계속 네발로 기어 올라 갔다.
주위가 보일때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가을 해는 빨리 진다.
산속의 해는 더 빨리 진다.
얼마를 올랐는지 모르지만 사방이 캄캄해지기 시작하고
나는 어둠속의 산행에 겁이 났다. 최집사도 그런것 같았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맹수가 있을리는 만무하고
걱정 할 일이라고는 우리 몸 밖에 없는데 우리는 주위가 무서워졌다.
산에서 제일 무서운 건 사람이라던가?
어느만큼 가니 사람소리가 들렸다.
텐트를 치고 장사를 하는 부부가 있는 곳이다.
저린 다리를 잠깐 쉬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우리는 아저씨에게 간청을 드렸다.
"아저씨, 여기서 우리 자고 가면 안될까요?"
"아이구...어쩌나 여긴 우리 두사람 잘 공간밖에 없는데....."
절망감이 몰려온다.
보다 못한 아저씨가 등산화를 벗으라면서 내 발을 맛사지 해 주었다.
"그래도 많이 올라 왔으니 쪼금만 힘내서 올라가봐요"
그래, 어차피 왔으니 올라갈 밖에.......
헌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바람이 너무나 세차게 불어 몸을 가눌수가 없었다.
정상이 가까운지 나무도 안 보이고 바위사이로 훤~하게 등산로가 보이기는 하는데
그 바람때문에 우리는 또 네 발로 기어 올라야 했다.
등에 진 배낭의 무게도 강적이였다.
두끼니의 도시락과 내복, 여벌옷, 수건등 아주 최소화한 짐인데
내 몸도 가눌수 없는 처지라 배낭을 버리고 싶을 뿐이였다.
올라 갈때 어떤 사람이 뜯지도 않은 고추장을 버린 걸 보면서
저 멀쩡한 걸 왜 버리고 갔지?.....최집사랑 웃었었는데
오죽하면 500g 고추장도 버리고 갔을까... 이해가 갔다.
우리 주위엔 아무도 없고 강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아~~
저 멀리 오른쪽에 불빛이 보인다.
우리의 목적지인 중청대피소가 저기인가 보다.
마지막 힘을 내어 가보니 작은 콘테이너에 달랑 전등만 달려 있는
간이 임시막이였을 뿐.......
우리는 또 네발로 기어서 오르기 시작했고 대청봉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청봉에 도착했다는 만족감이나 기쁨같은 걸 느낄만한 여력이 없었다.
나는 대청봉 정상에 중청대피소가 있는 줄 알았다.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캄캄한 밤 바위들만 덩그러니 있는 대청봉.
이때의 실망감......
대청봉바위에서 그냥 누워 잤으면 싶은.......
그 왼쪽 저~ 아래에 불빛이 여러개가 보이는 걸 보니
저기가 틀림없이 대피소일텐데 저기까지 또 어떻게 가나?
지금까지는 네발로 기어 올라왔지만
이 바람을 뚫고 가야 할 저기는 내리막 길이지 않은가?
그래도 가야 하니 어쩌겠는가?
막 대피소를 향해 내려가려는데 건장한 청년 둘이 오고 있다.
"연서회에서 온 팀이세요?"
"네~~~"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우리팀 아줌마들이 우리가
뒤쳐져서 고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조요청을 하여
대피소 구조요원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고 한다.
내 배낭을 대신 메고 내 손을 잡아 주는 구조요원.
그런데....그 배낭 도로 주었으면 싶었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내 몸이 휘청거려 중심을 잡을수가 없었기에......
정말 천신만고 끝에 대피소에 도착했다.
서너시간이면 올라간다는 대청봉
우리는 여섯시간을 기어 올라갔다.
대청봉에 대해서.....
정상은 일출과 낙조로 유명하며, 기상 변화가 심하고 강한 바람과 낮은 온도 때문에
눈잣나무 군락이 융단처럼 낮게 자라 국립공원 전체와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눈으로 덮여 있고, 6, 7월이면 진달래·철쭉·벚꽃으로 뒤덮이며,
요산요수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와 대청봉 표지석이 있다.
정상까지 오색 방면, 백담사 방면, 설악동 방면, 한계령 방면의 코스가 있는데,
오색에서 설악폭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5.3㎞(약 4시간 소요)가 최단거리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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