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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 이야기

순교의 발자취를 따라 다녀 온 1박 2일....2

 

 

침대는 두 집사들 차지하게 하고 나는 방바닥에 요를 깔고 잤는데

자기 전 살짝만 보일러를 켜 주다가 금방 껐는지 새벽에 기침하느라 깨버렸다.

바닥이 차가우면 기침을 하는 체질이 금방 표시가 나 버린다.

그나마 어젯밤에 받은 경락때문인지 몸은 그닥 피곤한 줄 모르겠다.

 

다른 두 사람 깰까봐 살그머니 세수하고 커튼을 젖혔더니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

7시에 출발한다고 했으니 시간이 많지만 한 방을 세사람이 쓰다 보면

혹시라도 시간이 모자랄까 싶어 혼자서 주섬주섬 짐을 쌌다.

 

오전 일정은 오동도에 가서 경건의 시간을 갖고 아침 식사를 하는거다.

7시에 숙소를 떠나 오동도 입구에서 내려 앞에 가시는 분들을 쫓아

부지런히 경건의 장소로 이동하여 가니 바닷가 너른 바위가 나온다.

 

오는 도중에 보니 여러 갈림길이 있었는데 빠른 걸음으로 걸은 우리를

뒷 사람들이 못 쫓아 오고 일행의 삼분의 이가 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어느 목사님이 그들을 찾아 나섰고 드디어 일행을 데리고 오신다.

시간이 조금 지체 되었지만 자유롭게 앉아 예배 드리고 사진 찍고

고개 너머에 있는 음식점에서 아침부터 조기매운탕으로 배를 채웠다.

 

 

숙소 창에서 본 풍경

 

 

오동도의 옆면.

오른쪽 계단으로 와야 할 일행이 안 보인다.

 

 

 

교구 목사님과 우리 일행

 

 

아침부터 거하게 먹은 조기매운탕

 

 

여수라 그런지 식당마다 갓김치가 나오긴 하는데

으째 맛은 별로네

 

 

이제 바다를 뒤로 하고 김제로 출발

어제밤 못 채운 잠을 채우느라 버스안이 조용하다.

늘 그렇지만 아줌마 할머니들이 움직이다 보니 예정시간보다

조금씩 늦게 출발하게 되고 도착 역시 늦어지게 되므로 일정이 바빠진다.

 

*김제 금산 교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번지)

 

100년 전에 ㄱ 자 형으로 지어져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교회가 금산교회이다

ㄱ 자형으로 예배당을 지은 이유는 남녀칠세부동석인 그 시절

남자와 여자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든 구조로 한때는 흰 포장을 하기도 했다.

 

1904년경 미국 선교사 테이트 목사가 사찰과 온갖 사교(邪敎 )가 우글대는

미신의 소굴같은 금산리에 교회를 세워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였고 집안 대대로 유교를 믿었던 조덕삼이 회심하여 자기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한 것이 금산리 기독교의 씨앗이 되었다.

 

조덕삼과 이자익.

조덕삼의 집에 마부로 일하는 이자익은 학교도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총명하여 틈틈이 독학을 하였고 주인을 따라 기독교에 심취하게 되어

조덕삼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된다.

그 후 장로를 피택하는 과정에서 마부인 이자익이 장로로 당선되었고

조덕삼은 교회의 결정에 기꺼이 따를 것을 말하며 교회안에서는

장로와 평신도로 집에서는 주인과 마부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게 되었다.

나중에 조덕삼도 장로가 되었고 조덕삼은 이자익을 신학교로 보내어

목사안수를 받게 하였고 이자익 목사는 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3번씩이나 선출되고 장로회 헌법을 최초로 기초하기도 하였다.

 

 

교회당은 한곳도 못을 친 곳이 없고 교회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다.

남자석 상량에는 한자로 여자석 상량에는 한글로 각각 성경말씀을 적어 넣었다.

지금까지도 조덕삼장로의 후손과 이자익목사의 후손들이

아름답게 서로에게 감사하며 교회를 섬긴다고 한다.

 

현재 금산교회 담임목사님의 구수한 설명을 듣자니 가는 시간이 아깝다.

우리의 일정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음이 아쉬웠다.

 

 

 

 

왼쪽이 조덕삼장로, 오른쪽 양복 입으신 분이 이자익목사

 

 

강대상과 여자석을 막아주는 흰 천 

왼쪽에는 여자석과 남자석을 막아주는 흰 천이 있다.

 

 

여자석 상량에 새긴 말씀

 

 

남자석엔 한문으로 쓰여 있다.

 

 

교회 근처 모악산 밑에서 점심을 먹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서울로 출발하였다.

최종 목적지는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

 

외국인 묘지는 자주 다니는 곳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양화진 홀에서 보는 여러 영상들이 처음 보는 것이라 새롭다.

몇 그룹으로 나눠서 선교사들의 묘지를 돌아보고 

우리 일행이 함께 경건의 시간을 갖고 우리 일정을 마쳤다.

 

김제를 떠나 오는 중 중간 휴게소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중환자실에 입원중인 우리 구역 성도님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는 전화.

그때부터 마음이 무거워서 서울까지의 3시간여 동안 혼자 기도하며 왔고

서울에 도착해서도 병원으로 바로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조급증이 났다.

 

다행히도 다음날부터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어 안심이 되었고

지난 주엔 일반 병실로 내려와 지난 주 금요일에 가 보니

몸은 많이 수척해졌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씩 회복해 가고 있었다.

 

모든 여정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

구역성도님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 온 것도 감사

계속 투병중이지만 조금씩 회복돼 가고 있음도 감사

이런 저런 일로 게으른 나를 기도하게 하시니 무조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