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벌써 7월, 그리고 4일이다.
너무 길고, 복잡하기도 하고, 정지되었던 것 같기도 한 6월이 갔다.
메르스 때문에 교회 평생대학은 일찍 방학에 들어갔고
주일 성경공부도 앞당겨 종강해서 어찌 보면 한가해진 시간들이다.
5월 21일에 구역의 노 권사님 부부를 요양병원에 보냈드렸다.
집사님과 권사님 두분 다 연로하시고 치매가 어느정도 진행되어
도저히 집에서는 보살핌이 불가능해서 취해진 결정이였다.
요양병원에 가시기 전 심방예배드리며 많이 울었다.
구역장을 많이 사랑해 주시던 분이였고 구역을 위해서도
젊은 사람들 보다 더 열심으로 기도해 주셨던 분인데
그렇게 보내 드리려니 마음이 아프고 자주 뵐수도 없기에 더 서운했다.
요양병원으로 한번 가뵙고 싶었는데 메르스때문에 면회가 안되고
병원도 좀 먼 곳에 있어 큰 맘 먹고 가지 않으면 안될것 같다.
6월 10일
남양주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우리 중창단이 공연을 했다.
몇년전 부터 한번 와 달라는 그쪽 목사님의 간청이 그때야 이루어졌다.
정말 아주 작은 상가교회에서 수요예배를 함께 드리고 왔다.
6월 17일
구역에 은퇴하신 목사님의 사모님이 소천하셔서 입관예배에 다녀왔다.
한창 메르스로 큰 병원이 더 위험하다고 할 때다.
장례식장이 김포라서 교회에서 상례부와 함께 교회차로 움직였다.
사모님 얼굴을 한번도 뵌적이 없다.
작년에 우리 구역으로 이사오실때 이미 암 수술을 하시고 요양중이라
댁에도 안계시고 친척집에 계신다는 말만 들었기에 어느 정도 차도가 있나 했더니
16일에 소천하셨다는 소식이다.
병원도 장례식장도 정말 한산했다. 메르스때문에...
다음날 다시 교회에서 모여 김포 장례식장으로 가서 발인예배 드리고
영락동산에 모신 다음 유족들을 위해 김포에 들러 유족분들 내려드리고
우리는 다시 교회로 갔고 나는 이틀동안 큰애네 애들을 제대로 봐주지 못했다.
작년 7월에 젊은 집사 한사람을 보냈었는데 일년만에 또 영락동산을 다녀왔다.
메르스때문에 조가팀없이 치른 유일한 장례식이다.
6월 22일에는 원래 명지병원 찬양공연날이였는데
메르스때문에 취소 되었다.
병원측에서는 우리가 와 주기를 바랬는데 우리 팀원 몇명이
메르스 염려증으로 강력하게 가지 말자고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공연을 취소하게 되었다.
근간에 뉴스를 보니 명지병원은 가장 안심해도 되는 병원이라고.....
내 몸은 잘 버텨 주었다.
역류성 식도염이 약간 있어서 약을 먹는 것 외에는....
적어도 지난 주 금요일까지 나는 잘 버티며 다녔다.
지난 주 금요일,
만남지 11권을 어깨에 메고 불편한 구두를 신고 남대문시장을 돌아다녔다.
그 전부터도 고질인 오른쪽 무릎이 조금씩 신호를 보냈지만
매일 목침운동으로 풀어 주면서 잘 견뎌 왔는데
드디어 지난 금요일 밤부터 무릎이 아파 잠도 못자고 밤새 뒤척이다가
토요일에는 앉지도 걷지도 못하고 백기를 들어야 했다.
일주일 지난 지금도 오른쪽 무릎은 좀 무겁지만 그냥 그냥 다닐만 하다.
이 나이에 이 정도 아픈건 약과지 뭐....이런 생각~
6월 28일에는 시청에서 동성애 퀴어축제에 반대하는 집회가 있었는데
내 상태로는 한시간도 서있을수 없을것 같아 교회만 다녀왔다.
요즘의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정말 기도하지 않을수 없고
교계가 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날 집회를 통해
모든 교계가 좀 각성하지 않았나 싶다.
죄 된것과 그 행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자...의 주제로
어제 금요공부에서 동성애에 대한 대처...뭐 이런 주제로 강의가 있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손주를 키우는 입장에서 보면 소극적인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큰애는 다니던 직장이 일년 계약이라 백수가 됐고
이제 나도 한달에 두주씩 아침 잠 모자라 고생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일년동안 애들 봐줄만큼 건강했던 것도 감사할 일이다.
아직 메르스가 확실하게 사라지지도 않았고
마른 장마로 비가 오지 않아 근심이 크다.
7월 중에는 모든 어려움들이 해결될까?
나라를 맡은 정치인들의 행태...는 듣는것도 지겹다.
그냥 무조건 엎드려 기도할 뿐이다.
그래서 6월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요즘 계속 듣는 곡...오펜바하의 자클린의 눈물(자클린 뒤 프레의 묵직한 연주)